5-1

 

 



제5화 각자의 마음
Coverging Feelings

 

 




오드릭
큭...!


아무도 없는 투기장에서 시작된 형제간의 결투. 오드릭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간신히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빅토르
아까부터 내 공격을 막고만 있군. 긍지높은 레비온의 왕이라면 한 번쯤은 되받아치는 게 어떻겠나?

오드릭
하아... 하아... 빅토르, 용서해 줘...

빅토르
용서해? 뭐에 대해 사죄하는 거지?

오드릭
화 많이 났지? 빅토르를 계속 피해다녀서... 미안해. 사과할 테니까 용서해 줘...

빅토르
결투하는 중에 우는 소리 하지 마라! 그러니 너는 무능하고 물러터졌다는 거다!

오드릭
(무능하고 물러터진...)





[회상]

 

 



형제의 아버지
이제 됐다... 무능하고 물러터진 녀석에게 물려줄 왕관은 없어!

빅토르
이런 것도 이애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을 줄이야.





오드릭
으흑...

빅토르
울지 마! 적 앞에서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녀석이 어디 있나!

오드릭
하지만... 훌쩍.

빅토르
쳇... 형님이 무른 데다 한심하기까지 하니 왕의 권력에 발목이 잡히는 거야. 유리우스의 꼭두각시가 되어서까지 왕을 계속하다니, 네겐 수치심이라는 것도 없나?

오드릭
꼭두각시라니...?

빅토르
설명하지 않아도 알 텐데?

오드릭
크윽...!







미안해. 번개를 피해서 내려와 있느라고 왕님 쪽은 미처 못 봤어.

유리우스
어쩔 수 없지. 레비온의 번개는 격렬하니까.


지금은 번개도 잦아들었고... 한번 더 하늘에서 찾아볼게!)

유리우스
(이해가 안 가는군. 폐하가 한계에 달한 것도 아닌데 제노 공을 따돌리고 어딘가로 가시다니...)

...!

(설마 전하가...? 그때 전하가 향하신 곳은...)


유리우스가 기억을 더듬어 빅토르가 향했던 방향으로 눈을 돌리자, 멀리 낡은 투기장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유리우스
(폐하의 목숨이 위험해...!)





오드릭
으...!

빅토르
아까부터 말이 없군. 나한테 해야 할 말이 있을 텐데?

오드릭
해야 할 말...?

빅토르
확실히 말해주지 않으면 모르는 건가. 유리우스에게 협박당하고 있지 않나. 왜 내게 구해달라고 하지 않지?

오드릭
내가 협박당하고 있다고...?

빅토르
누가 봐도 자명하지 않나. 아바마마께서 유리우스를 죽이려 하셨다고? 웃기는군! 아무리 무능해도 그러한 헛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을 텐데?

오드릭
아, 아니야...!

빅토르
뭐가 아니라는 거지?

오드릭
그건 아니야... 빅토르...

빅토르
흥... 역시 이렇게 할 수밖에 없겠군.

오드릭
으왓...!


빅토르는 강하게 밀어붙여 형을 쓰러뜨린 후, 엉덩방아를 찧은 그에게 검 끝을 들이댔다.


빅토르
패배를 선언해라. 왕위는 내가 물려받지.

오드릭
...뭐?

빅토르
이 이상 번거롭게 만들지 마라.

오드릭
어째서? 그건 너무 억지잖아...

빅토르
형님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게 잘못이야.


빅토르는 거리를 좁히며 오드릭이 쓰고 있는 왕관을 들어올리듯 검 끝을 갖다댔다.


빅토르
자, 선언해라.

오드릭
......

빅토르
어서 말하라고!

오드릭
...!

유리우스
하아... 하아... 폐하!

빅토르
...!

오드릭
유리우스 님...?

유리우스
부디 도망치십시오. 폐하를 잃으면 이 나라는...

빅토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내가 형님을 죽일 거라는 거냐? 네놈과 똑같이 보지 마라!!!!!

유리우스
...!?


유리우스의 모습을 본 순간 빅토르의 얼굴이 분노에 차올랐고, 그는 목표를 유리우스로 바꾸어 맹공을 퍼부었다.


빅토르
어째서 아바마마는 죽고 네놈이 살아있는 거냐? 아바마마 다음에는 형님인가? 그렇게까지 왕실이 증오스러운 건가? 내가 없애주마! 네놈이야말로 이 나라의 독이다! 이대로 살려둘 수는 없어!

유리우스
큭...!

촉수
...!

유리우스
...! 나오지 마!

촉수
!?

빅토르
하아아아앗!

유리우스
커헉!


빅토르의 맹렬한 공격을 버티지 못한 유리우스는 검을 놓친 채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유리우스
큭...!

오드릭
빅토르, 안 돼!

빅토르
죽어라아아아아!

???
그럴 수는 없지!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 그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유리우스의 앞을 막아서며 빅토르의 칼날을 막아냈다.


빅토르
쳇...! 비켜!

제노
어쩔 수 없군... 전하,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빅토르
뭣...!?

비이의 목소리
어이! 괜찮아?

빅토르
쳇... 유리우스의 동료 놈들인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눈치챈 빅토르는 튕겨나간 검을 줍자마자 빠르게 투기장을 벗어났다.

 

 




5-2


오드릭
유리우스 님! 다치신 데는 없으신가요?

유리우스
예... 빅토르 전하는 강하시군요.

제노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마안을 가진 여자가 말하길 네가 투기장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급히 달려온 거다.

유리우스
죄송합니다. 그리고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노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몰린 거냐? 날 칭칭 얽어맸던 그 힘은 어쩌고?

유리우스
...아버지를 죽였던 흉기로는...

제노
그런 거였나...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힘을 억누르다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폐하와 알베르의 마음은 어찌하라는 거냐.

유리우스
......


제노는 유리우스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세우더니 등을 팡 내려쳤다.


제노
그만 가라. 알베르에게 폐하가 무사하다고 전해 주고 와.

유리우스
...예.


유리우스는 깊이 고개를 숙이더니 검을 주워 투기장 밖으로 나섰다.


오드릭
죄송해요... 마음대로 빠져나가서...

제노
이유는 나중에 묻지. 자, 이리 가까이 와 봐라. 내 털에 닿으면 마음이 진정되지.

오드릭
네...?


제노는 오드릭 뒤쪽에서 몸을 숙이더니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이 주인의 몸을 감싸안았다.


퓐프
저, 저기... 어떻게 된 거야? 왕님네는 왜 싸웠던 거야?

시에테
으음... 뭐, 상당히 험악한 형제 싸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퓐프
형제 싸움은 진짜 검 가지고 하는 게 아니야~!

시에테
가족이라는 것에도 다양한 사정이 있으니까.

비이
그치만 퓐프 말이 맞아. 왜 싸웠던 건데?

제노
그냥 싸움이 아냐. 결투다.

루리아
겨, 결투요...?

제노
낡은 관례다. 왕실 사람들은 결투를 신청받으면 결코 거절해서는 안 된다. 옛날에는 결투를 몇 번이나 거절한 끝에 왕실에서 추방당한 인물도 있었다.

루리아
추방이라니... 무서운 관례네요.

제노
영웅이 선두에 나서 빛나는 영광으로 강한 나라를 키우며 민중들을 이끄는 것. 그것이 레비온이라는 나라이다. 왕실 사람들은 이 나라가 존재하는 방식의 모범이 되어야만 하지. 

비이
그건 어제도 들었는데, 그런 건 이 왕님한테는...

오드릭
시대착오예요... 개척해야 할 땅도, 일으켜야 할 나라도 없는데 무력만 가지고 긍지니 뭐니 해 봤자... 하지만 약한 제가 이런 의견을 내 봤자 전통과 관습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겠죠. 저는 빅토르도 계속 실망시키기만 했어요. ...그만 사라지고 싶어요.

제노
폐하...

니오
......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니오가 앞으로 나섰다. 오드릭은 이상하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니오
이 나라 사람들은 당신에게 감사하고 있어. 자신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오드릭
그런가요...?

니오
온천 거리에는 기분 좋은 선율이 흘러넘치고 있었어.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마음, 당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마음의 선율이 들리지 않아도 그건 전해졌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아?


맞아. 어느 가게 사람들이나 얼굴은 웃고 있고, 다들 온천 거리를 정말 좋아한다는 것이 느껴졌어.

실바
관광하러 들른 사람들도 모두 이 거리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희들도...

오드릭
...분명 그게 옳은 거라고 믿으면서 지금까지 노력해 왔습니다. 의회 분들도 응원해 주셨고요. 하지만 빅토르와는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었어요. 왜냐면 빅토르는 이런 레비온을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언제 무능하고 물러터진 녀석은 입을 다물라는 소리를 들을지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죠. 저는 계속 도망치기만 했어요. 왕이면서... 형이면서도...

니오
("무능하고 물러터진" 이라는 말에 속박당하고 있구나. 선율이 흐트러져 버릴 정도로)

오드릭
서로 얘기하고 이해해 나가야 하는데... 우린 피가 이어진 형제인데...

니오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야. 제대로 대화를 나눌 필요는 있겠지만. 동생분의 선율은 분명 실망과 분노로 어지러웠어. 하지만 당신을 싫어하고 있는 건 아냐. 당신이 진짜 선율을 되찾는다면 분명 잘 될 거야.

오드릭
진짜 선율...?

니오
지금까지 쭉 들어온 말... 그게 현을 잡아당기고, 엉겨붙은 공포가 짓누르고 있어.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런 상태였구나. 대단히 괴로웠을 거야. 알려줘. 동생분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오드릭
이야기하고... 싶어요. 제대로 얼굴을 보고요...

니오
알았어. 각오를 말로 꺼낼 수 있었던 당신에게 약간의 용기를.


니오는 그렇게 말하며 악기를 들더니 밝고 경쾌한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드릭
(신기한 멜로디... 듣고만 있어도 힘이 솟아오르는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워져...)

제노
(폐하의 떨림이 멈췄군)

니오
(알고 있어. 두려운 것에 맞서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아. 당신에게 보내는 선율은 용기의 불씨. 동생과 마주보며 진정한 당신을 되살려내기 위한 것. 

동생분의 선율은 "걱정". ...실망도 분노도 모두 거기서 피어난 거니까)


니오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점점 원래의 음색을 되찾고 있는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연주를 계속해나갔다.

 

 




5-3


유리우스
후우...

촉수
...

유리우스
후... 내가 지시할 때까지 나오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유리우스는 허리에서 튀어나온 촉수를 감추듯이 외투 소매를 들어올렸다.

 


촉수
...??

유리우스
괜찮다. 오히려 난 안심했어. 그 상황에서 전하는 사고로 위장하면서 폐하를 없애버릴 수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전하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

그 둘은 "가족"이었어. 처음부터 생명의 위기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던 거야.

촉수
~~♪

...?

유리우스
음?


문득 촉수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가면을 쓴 청년이 서 있었다.


시스
왕은 찾아냈나?

유리우스
그래, 방금 전에. 걱정 끼쳐서 미안하군.

촉수
~~♪

시스
......

유리우스
숨어.

촉수
...!

시스
그 힘은 뭐지?

유리우스
......

 




[회상]


갈리아 부대 대장
아버지이신 선왕을 살해한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이런 만행을 벌이는 건가. 저주받은 아이라는 이름이 딱 들어맞는구만.





유리우스
(그는 그때 그 자리에 있었어. 들어버린 거야...)

...너는 내 죄에 대해 묻고 싶은 거겠지?

시스
...? 어떻게 알았나?

유리우스
......

미안하군. 누군가의 과거를 캐보는 취미는 없다만... 내겐 폐하의 안전을 제일로 생각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폐하와 같은 여관에 묵는 너희들에 대해서도 사전에 조사했었지. 그러는 사이 너의 죄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시스
......

유리우스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네 됨됨이에 대해서는 단장으로부터 들었다. 위험인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다만 네가 내게 흥미를 가지기엔 충분한 이유라고 생각했거든.

시스
...네가 말한 대로다. 나는 네게 흥미가 있었다. 내 주변에는 마피아같은 악인과 싸우다 죄를 범한 자도 있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내가 빼앗은 것은 완전히 무고한 생명들이다. 이 나라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살해했다는 선왕이라는 자는... 악인은 아니었겠지?

유리우스
...그래. "악인"은 아니었다.

시스
...역시 그랬나.

유리우스
죄인과 속죄하는 자... 우리는 닮은 사람들일지도 모르겠군.

시스
속죄하는 자라... 네 경우에는 왕을 보호하고 나라에 헌신하며 미래를 밝혀나가는 것이 속죄인 거겠군.

유리우스
...? 그래...

시스
...아니, 깊은 뜻이 있는 건 아니다. 단지 나는... 그 녀석과 만났을 때 무엇을 하든 속죄가 되지 않을 거라고 통감했을 뿐이다. 

유리우스
그런가. 너희 일족은...

시스
그것은 내가 일으킨 사건이다. 네가 동정할 필요는 없어.

유리우스
......

시스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유리우스
어떻게냐니...?

시스
속죄할 방법도 없으면서 살아남아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나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나?

유리우스
...어려운 질문이군. 하지만 솔직하게 느낀 바를 말하자면... 죄인이 살아가는 것은 속죄를 위해서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시스
어째서지?

유리우스
...한때 나는 모든 것을 집어던지고 스스로의 목숨을 끊고자 했었다. 그러나 자기 목숨을 걸고 나를 구하러 와 준 친구가 있었지. 심지어 그 친구는 내가 살아간다는 선택을 한 것을 후회하지 않게끔 나라를 바꿔나가겠다고까지 말했다. 그저 여기에 있기만 하면 된다고... 그런 마음을 받아들이고 보답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거든.

시스
...그래. 나도 그 기분은 잘 알겠다. 이 손으로 일족을 멸망시켰을 때부터, 줄곧 내가 범한 죄에 대한 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웃기는 이야기지. 괴물이라고 불리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어둠 속에 숨었으면서 말이다. 그러는 사이 십천중과... 단장 일행과 만났다.

유리우스
그들이 구원해 준 거군.

시스
그래. 특히 단장은 말이지... 갑자기 내게 싸움을 걸어서 이기더니, "이걸로 내가 더 괴물이네" 같은 소리를 하더군. 

유리우스
...단장다워.

시스
그렇게 나를 받아들여준 사람들을 배신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찰나, 드디어 나를 규탄하는 자가 나타나고 말았다. 죄에 벌이 내려질 때가 온 거다.

허나 나는 살아남고 싶었다. 목숨을 걸고 싸웠다. 필사적이었어. 녀석에게라면 살해당한다 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버릴 수 없었다. 

그 빛은 내가 줄곧 갖고싶어했던 것이었다.. 동경했지만 너무 멀었고, 포기했지만 구원받아... 마침내 손을 뻗을 수 있었던 것. 그 반짝임을 지키기 위해 나는 싸웠다.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해도 동료들과 살아가는 미래를 잃고 싶지 않았다.

유리우스
잘못된 선택이라... 그렇다고 해도 괜찮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실제로 네가 살아남아 준 덕분에 나와 온천 거리도 무사할 수 있었으니까.

시스
그런가... 괜찮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라. 마음 쓰게 만들어서 미안하군.

유리우스
그렇지 않아. 전부 본심이다.


유리우스는 부드럽게 미소짓더니 허리에 살짝 손을 올렸다.


유리우스
...그러고 보니, 네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었군.

촉수
...

시스
......

유리우스
이건 내게 기생하고 있는 성정수 몸의 일부다. 이름은 디스트럭티오라고 하지. 나는 이 힘으로 생명을 빼앗았다. 지켜야만 할 조국을 존망의 위기에 몰아넣었다. 그것이 나의 죄다.

시스
...그런가.

유리우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면 평범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안에는 추악하고 잔혹한 괴물이 숨죽이고 있다. 사실은 언제 그것이 눈을 떠서 나라를 멸망시킨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지. 

시스
괴물이 아닐 텐데. 어떤 상태라고 해도 너는 너다. 단장의 친구이지 않나? 그 녀석이 너를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을 용서할 리가 없어.

유리우스
...!

시스
단장뿐만이 아니다. 너를 걱정하는 빨간 망토 남자나, 너를 따르는 마음 착한 왕도... 너를 괴물 취급하지 않을 텐데.

유리우스
......

그렇지... 이걸 괴물이라고 부르고 있는 건 나뿐이다. 

시스
그럼 그만두는 게 좋을걸. 나도 너를 괴물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유리우스
...그래. 고치도록 하마.

(받아들이는 것... 아마도 이게 그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일 테니까 )

시스
...이제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단장이 어째서 내게 그렇게까지 괴물이 아니라는 소리를 계속했는지.

유리우스
고맙다, 시스. 너와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았어.

시스
그래... 아니, 나야말로 감사한다.


유리우스는 촉수를 집어넣더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대로 시스 옆을 지나치려 한 순간이었다.


시스
...살아가자. 너와 나 둘 다.

유리우스
...!

그래. 살아가야지.


무언가를 붙들어매려는 것처럼, 결의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시스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유리우스
......

촉수
...?

유리우스
그래. 또 다시 이야기해 보고 싶군.


유리우스가 다시 걷기 시작하는 것을 본 촉수는 만족한 듯이 그 몸을 수그러트렸다.

 

 




5-4


빅토르
......


그때 빅토르는 사람 없는 초원에서 열심히 검을 휘두르며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회상]


형제의 아버지
빅토르, 그대는 강하고 똑똑해. 정말 잘 자란 아들이다. 아버지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언젠가 그대가 이 나라를 짊어지게 될 것이다만, 한 가지 청이 있다. 

빅토르
청이라 하시면?

형제의 아버지
오드릭에 대해서다. 그 아이는 간혹 입을 열었나 싶으면 영문 모를 소리만 꺼내곤 하는 골치 아픈 아이다만... 왕실의 자식인 이상 나라의 보물이다. 손 가는 괴짜라고 해도 내게 있어서는 귀여운 아들 중 하나지. 

빅토르
잘 알고 있습니다.

형제의 아버지
나는 그대들 형제의 부모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먼저 세상을 뜨게 되겠지. 빅토르여, 언젠가 왕위를 이은 후에도 오드릭을 신경써 줬으면 한다. 그 아이가 혼자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이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대가 지켜 줬으면 한다. 

빅토르
...예. 형님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빅토르
(아바마마는 형님을 사랑하셨다. 그런데도...)





[회상]


오드릭
아바마마는 사건이 일어났던 날 하필 유리우스 님을 주살하려고 하셨던 모양이더군요... 그 외에도 아바마마께서는 많은 끔찍한 짓을 저지르셨습니다... 역시 아바마마의 죽음을 유리우스 님만의 문제로 만드는 것은 지나친 횡포입니다. 속죄할 기회를... 함께 갚아나갈 길을 찾아나가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빅토르
(백성들 앞에서 그런 연설을... 어째서 대죄인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며 내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거지?)

큭...!

(아바마마... 역시 저는 형님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나루메아
안녕. 엄청 열심히 단련하고 있네.

빅토르
......

나루메아
어, 어라... 안 들렸나...?

빅토르
단련에 방해된다. 사라져라.

나루메아
으음...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빅토르
내게 결투를 청하는 건가?

나루메아
그렇게 받아들여도 좋아.

빅토르
알겠다... 간다!


빅토르는 말하자마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검을 찔러나갔다. 그에 맞서는 나루메아는 빅토르의 공격을 자신의 도로 흘려보내면서 그의 움직임을 살펴보다가 빈틈이 보이면 반격하고 있었다.


퓐프
얼레? 왜 둘이 싸우고 있는 거야?

옥토
기량의 확인이다.

퓐프
우! 나루 언니, 이야기한다고 해 놓고...

옥토
이야기할 만한 상대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위해서는 말하기 전에 칼날을 부딪쳐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퓐프
우우! 칼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고 전에도 말했잖아!

옥토
말 없는 대화를 더 편하게 여기는 자도 있느니라. 또는 권위 탓에 쉽게 그 심경을 털어놓을 수 없는 자도 그러하지.

퓐프
우~ 그렇게 머리 딱딱하게 쓰면 안 된다니까!

옥토
걱정치 말거라. 검은 맞댈지언정 서로를 죽이려 들지는 않을 테니.

빅토르
거기!

핫?

나루메아
...!


나비로 모습을 바꾸더니 빅토르 뒤로 파고든 나루메아의 도가 빅토르의 목을 겨눴다.


빅토르
...졌다.

나루메아
후우. 겨우 이겼네.

빅토르
흥... 뻔히 보이는 소리를... 덤비기 전부터 승리를 확신하고 있지 않았나.

나루메아
글쎄? 승부는 언제나 마지막까지 모르는 거야. 하지만... 당신은 승리에 대한 확신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

빅토르
...망설이며 흔들리는 칼날로는 아무 것도 붙잡을 수 없어. 아바마마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빅토르는 검을 집어넣더니 나루메아 쪽을 돌아보았다.


나루메아
이야기해 줄 거야?

빅토르
패자는 승자의 부탁을 들어야 하는 법. 무엇을 물으려 하지?

나루메아
음... 어째서 형한테 결투를 신청한 거야?

빅토르
형님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다.

나루메아
이야기를 하려고 결투했다고?

빅토르
...나는 그 외의 대화하는 방법을 모른다. 아바마마와는 언제나 검을 부딪치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게다가 형님은 내 모습을 보기만 해도 도망쳐 버린다. 결투라도 신청하지 않으면 둘만 있을 수 없었어.

나루메아
형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괜찮으면 이 누나한테 들려 줄래?

빅토르
이야기하자면 길다만... 왕실의 적자로서 태어난 형님은 어렸을 때부터 왕으로서 이 나라를 짊어져 달라는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형님은 영 우수하지 못한 살마이었지. 검술 실력은 물론, 아바마마의 이상을 이해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무능아였다. 무거운 입을 겨우 열었나 싶으면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만 했다. 결국 아바마마는...





[회상]


형제의 아버지
레비온을 교역 도시로 만들고 싶다고? 검술의 재능이 없는 본인이 다루기 편한 나라로 만들려고 하는 거냐, 이 무능한!

오드릭
그, 그럴 생각은...

형제의 아버지
쓸데없는 허언 늘어놓을 시간 있으면 검술 실력을 길러라! 얼마나 날 실망시키고 싶은 거냐!

더 이상은 됐다... 무능하고 물러터진 놈에게 넘겨줄 왕관은 없어! 그대는 역사 연구나 하도록 하거라.





나루메아
전대 왕님한테 버림받은 거야?

빅토르
그래. 이후 형님은 정말 하루 종일 왕실 서고에 틀어박혀 역사 연구를 시작했다. 그렇기에 나는 왕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지. 하지만 실제로는...

나루메아
형이 왕이 되어 버렸구나.

빅토르
처음에는 뭔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다.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숨을 거두실 때 아바마마가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더군... 그렇다면 나는 형님이 왕으로서의 각오가 있는지 확인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





오드릭
아...

빅토르
지금이 몇 시야?

오드릭
...미안.

빅토르
제안서를 체크하고 있었나? 그냥 사인하면 되는 일이잖아? 어째서 빠르게 끝내지 않는 거지?

오드릭
하, 하지만... 이건...

빅토르
못 읽는 건가? 이리 줘. 내가 대신 보지.

흠...렐프 경인가. 서류에 빠진 부분은 없어. 내용도 아바마마가 다스리던 때와 같다. 전부 지금까지 해 온 그대로야. 문제 없다.

오드릭
지금까지 해 온 그대로...

빅토르
이런 것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을 줄이야. 레비온 왕이 들으면 웃겠군.

오드릭
......

빅토르
이쪽은 멜빌 경인가. 멜빌 경은 아바마마와 특히 교우가...

형님!? 어딜 가는 거야!





빅토르
그 후, 한참 찾아다니다 결국 발견했을 때는 바깥의 마구간에서 세인트 레잔 이야기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더군.

나루메아
그건... 왕으로서 적절한 행동은 아닐지도 모르겠네...

빅토르
거기서 내가 화를 낸 게 통했던 건지, 한동안은 나와 측근들이 하는 말을 따라 얌전히 사인을 하게 되었다만... 유리우스가 돌아온 후로는 이상해졌어. 형님 곁에는 항상 늑대 남자가 따라붙고, 국정도 변했지. 형님이 그 대죄인에게 속아넘어간 것이 분명해. 그렇다면 내가 왕이 되어 이 나라를 통치해야 해!

나루메아
사정은 대단히 잘 알겠는데... 그 이야기는 역시 결투하면서 할 게 아니라고 생각해.

빅토르
그럼 어떡하라는 거지? 형님의 입을 열게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어렸을 때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는 말도 꺼내지 못해, 귀족들이 모인 곳에서 바지에 지린 적도 있을 정도야.

나루메아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있지. 본심을 전한다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말을 한다는 건 간단해 보이지만 어렵지. 나도 동경하던 사람에게 그저 같이 놀아줬으면 할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엇나가 버렸어. 정말 엄청나게 엇나갔지... 서로 계속 오해한 채로 결투까지 해 버리고...

하지만 거기 있던 퓐프쨩이 말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걸 듣고 드디어 진짜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었어.


나루메아는 퓐프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든 뒤 빅토르 쪽을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나루메아
당신은 검으로 대화하는 법밖에 모른다고 했지만, 그럴 리가 없어. 왜냐면 나한테는 제대로 얘기했잖아? 지금 말했던 당신의 마음을 형한테 전해 보면 어떨까?

빅토르
무리다. 형님이 나를 이해할 리가 없어...

나루메아
그러니 더욱 해 봐야지. 알 리가 없다고 포기하면 언제까지고 다가갈 수 없을 거야. 형, 착한 사람이지? 당신이 마물을 불러들였을지도 몰라서 걱정하면서 뛰쳐나갔다고 들었어.

빅토르
하지만 형님은...

오드릭
정말 미안해, 빅토르.

빅토르
형님...!?

오드릭
내가 나빴어... 빅토르가 나랑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걸 알면서도 도망치기만 해서...


끊어질 듯 가냘프긴 하지만 먼저 말을 꺼내는 형을 보며, 빅토르는 눈을 크게 뜨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갔다.


빅토르
왕위를 양보할 마음이 들었나?

오드릭
어, 그건 아니고... 빅토르. 나랑 같이 온천 거리를 돌아봐 줬으면 좋겠어.

빅토르
...뭐?

오드릭
부탁할게.

빅토르
무슨 바람이 분 거지? 목적은 뭐야?

나루메아
에이, 그렇게 무섭게 굴지 말고. 응?

빅토르
...가면 알 수 있는 건가?

오드릭
응...

빅토르
알겠다. 직접 왔다는 점을 사서 그 부탁, 들어 주지. 가자.

오드릭
(제대로 말했어... 니오 님의 조율의 힘은 대단해...)

퓐프
다행이다~! 이번에는 검 쓰지 않고 말로 할 수 있을 것 같네!

나루메아
응! 잘 됐으면 좋겠다.


나루메아 일행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온천 거리에 향하는 형제를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