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제3화 사람이 살아가는 수단은*
Living Verily
*朱(붉을 주)의 발음을 이용한 말장난
윌나스의 시련을 앞둔 이른 아침,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어두운 기공정 복도를 루리아와 비이가 조용히 걷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주방에 들어가더니 테이블 위에 각종 도구와 재료를 늘어놓았다.
루리아
치즈랑 베이컨이랑 달걀이랑... 바게트 써도 괜찮을 것 같아요!
비이
좋아. 그럼 샌드위치 만드는 거지? 난 뭐 하면 돼, 루리아?
루리아
바게트 좀 썰어 주시고, 버터 부드럽게 휘저어서 자른 면에 발라 주실래요? 저는 그 사이에 넣을 재료 준비할게요! 음... 삶은 달걀 으깨서 버무린 걸로 해야겠어요. 이거라면 실패할 일도 거의 없을 테니까.
비이
바게트 준비라면 나한테 맡겨! 그거 말고도 내가 할 수 있을만한 거 있으면 말해 줘.
루리아
네! 맛있는 도시락 만들어서 지타가 시련을 돌파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돕자구요!
비이
헤헤. 치즈도 잔뜩 넣자! 힘이 쑥쑥 솟아나올 샌드위치를 만드는 거야! 아, 맞다! 예전 근처에 살던 할머니가 만들어 줬던 음료수도 만들 수 있겠는데...
루리아
수분 보충도 중요하니까요! 제대로 준비할 수 있게끔 우리 열심히 해요, 비이 씨!
비이
그래!
루리아와 비이는 고개를 끄덕인 후 지타가 일어나기 전에 도시락을 준비하려고 서둘러 움직였다.
이윽고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난 지타는 루리아, 비이와 함께 윌나스가 기다리는 섬으로 향했다.
윌나스
훌륭하구나, 훌륭해! 약속된 시각보다 상당히 빠르게 도착했군! 우리 중 루 오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간 감각이 희박하거든. 시간과 관련해서는 상당히 느슨해지곤 하지.
비이
시간감각 말고도 여러 가지로 느슨한 것 같은데... 아무튼 얘가 어디를 갈면 되는데?
윌나스
음! 이 실개천을 경계로 삼자! 바위는 다 치워뒀다고 생각한다만 작은 돌은 놓쳤을지도 모르겠다.
비이
그런 부분의 정리까지 포함해서 땅을 "갈으라"는 건가... 도구는 있어?
윌나스
그래. 가래? 니 괭이니 하는 것들을 루 오가 준비해 줬지!
윌나스가 손을 흔들자, 그의 발 밑에 다양한 도구들이 나타났기에 지타는 사용할 도구를 골랐다.
윌나스
밭으로 쓸 만큼 잘 갈았는지 어떤지 판정할 심판으로는 갈레온을 불렀다!
갈레온
정시.
(시련 개시 시간이군요. 준비는 되셨나요?)
루리아
지타! 힘내세요...!
갈레온
개시.
(그럼 정정당당하게... 승부 시작입니다)
갈레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지타는 우선 자신이 갈아야 할 범위를 돌아보았다.
윌나스
흐음, 하아!
지타가 확인하는 사이에도 윌나스는 괭이를 휘둘러 땅에 섞인 자갈을 박살내며 땅을 갈아나가고 있었다.
비이
으아! 엄청난 기세네...
루리아
우... 역시 육룡답네요. 지타, 이길 수 있을까요...?
지타는 옛 경험을 되살리며 방해되는 돌들을 치우고 정성스럽게 땅을 갈아엎었다. 전투할 때와는 다른 부위에 힘이 실리는 감각에 쉴새없이 땀이 흘렀다.
비이
어이~ 지타! 슬슬 잠깐 쉬면서 수분 좀 보충해! 자. 근처 할머니가 자주 만들어 주시던 음료수 만들어 왔어. 옛날 생각나지?
지타는 감사를 표한 후 비이가 건네 준 수통으로 목을 축였다.
비이
루리아도 마실래? 꿀이랑 레몬이랑 생강 시럽을 물에 탄 거야!
[이름이 기네]
비이
어쩔 수 없잖아. 할머니가 이름을 안 지어 줘서 뭔지 모르는걸...
루리아
두 분의 추억이 서린 맛인 거군요... 잘 마실게요!
와~ 달고 맛있어요! 깔끔해서 마시기도 편하네요!
비이
뭐래더라, 레몬을 넣었을 때의 신맛?이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된다나... 점심은 루리아가 도시락 만들어 왔어! 기대하면서 작업 열심히 해.
지타는 비이와 루리아를 향해 웃어보인 후 다시 농기구를 들고 땅에 섰다.
윌나스
흐음... 휴식이라. 의외로 여유롭군.
갈레온
습숙.
(특이점은 농사일 경험자인 모양이군요)
윌나스
선배, 선배란 말이지! 오오, 시련 결과가 기대되는걸!
우오오오오!!
3-2
루리아와 비이, 갈레온이 지켜보는 사이 지타와 윌나스는 작업을 계속해나갔다.
갈레온
고뇌.
(난감하군요...)
루리아
왜 그러세요, 갈레온 씨?
갈레온
영위.
(본디 식물이나 동물이나 훨씬 더 드넓은 대지에서 생활을 영위해나갈 수 있었을 겁니다.)
훼손.
(허나 창세의 뒤틀림이 하늘의 세계에 있는 생명에게서 대지를 빼앗았죠)
비이
어음... 우리 꽤 넓은 세계에서 잘 살고 있는 거 같은데...?
갈레온
착오.
(그것은 지금의 세계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이렇게 조각난 섬이 아니었죠...)
루리아
섬이 아니었다고요...
갈레온
책외.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운 모양이군요. 세계를 걷는 가련한 생명이여...)
축복.
(축복이라도 내려 드리죠)
갈레온은 루리아를 살포시 껴안더니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이어서 비이의 이마 쪽으로 얼굴을 갖다댔다.
비이
으어! 아니, 갑자기 키스하면 깜짝 놀라잖아!
갈레온
은총.
(미력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선물. 사양할 거 없습니다)
비이
아... 진짜 육룡이란 애들은 왜 이렇게 이상한 녀석들만...
루리아
아! 비이 씨. 지타가 쉬려나 봐요.
비이
오, 그럼 슬슬 점심 먹을까?
루리아와 비이, 지타는 함께 아침에 만들어 온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갈레온
평온.
(안온한 광경이군요...)
소음.
(저 거슬리는 소리만 없다면 말이죠...)
윌나스
흐으~ 하... 후~ 하...
틈틈히 수분을 섭취하며 휴식을 취한 지타는 처음보다 그리 처지지 않는 속도로 작업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윌나스
여엉, 차. 영...
그으으...
한편, 윌나스는 아침에 비해 작업 속도가 상당히 더뎌진 상태였다.
윌나스
하아, 하아... 뭐지 이건...? 평범한 흙일 뿐인데 무겁게 느껴지는군. 하지만 갈레온이 원소에 힘을 불어넣은 건 아닐 터인데. 어째서 나무와 철 덩어리에서 이런 저림이 느껴지는 거지? 마술도 아니고 저주도 아니고...
후우, 하아!
갈레온
...
윌나스
그, 으...
루리아
아앗! 윌나스 씨, 괜찮으세요?
윌나스가 쓰러지자, 루리아는 지타를 비이에게 맡긴 채 육룡의 "주" 곁으로 달려왔다.
윌나스
괜찮, 다...
루리아
그치만 엄청 피곤해 보이세요. 어라? 그런데 땀은 안 나는 것 같네요?
아! 윌나스 씨, 이러시면 안 돼요. 물을 마시지 않으면 열사병에 걸린다고요!
윌나스
열사...?
루리아
그렇구나... 사람과 비슷한 그릇으로 움직이는 것에 익숙치 않아서 모르셨군요... 윌나스 씨. 그늘로 가요!
루리아는 자신의 몸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윌나스를 그늘로 데려가 물을 준 후 간병했다.
루리아
젖은 타올을 대고 있으면 조금 편하실 거예요!
윌나스
면목없군... 감사, 감사한다...
루리아가 윌나스를 돌보는 것을 확인한 지타는 작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갈레온
정각.
(여기까지. 시련 종료 시각입니다)
비이
후우... 수고했어! 지타.
갈레온
검분.
(결과를 확인해 보죠. 흙의 상태는... 그렇군요)
루리아
두근두근...
윌나스
기다리게 기다려, 갈레온! 말할 것도 없어! 누가 봐도 특이점의 승리야! 일의 섬세함이나 땅을 간 범위나, 전부 난 비교할 것도 못 돼. 허허 참, 이렇게 다루기 힘든 인간의 몸을 그리 능숙하게 다루다니 훌륭하구만! 대단해, 대단해.
갈레온
칭찬.
(그렇답니다. 특이점, 시련을 뛰어넘었군요)
비이
해냈어, 지타!
루리아
지타, 대단해요~!
비이
오후에는 거의 쉬기만 하던데, 윌나스. 몸은 좀 괜찮아?
윌나스
문제 없다! 되려 인간을 따라한 것이 원인이었으니! 마력과 원소가 차오르면 피로같은 건 적이 못 되지. 허나 귀중한 경험이었다!
연약한 몸이지만 그렇기에 기술과 문화를 만들어내는구나... 인간들은 역시 훌륭하다, 훌륭해! 이 하늘의 세계는 실로 재미있지 않나! 안 그런가, 갈레온?
갈레온
...
윌나스
특이점이여. 시련, 아니 밭일을 함께해 줘서 고맙다! 언젠가 여기에 식재료가 열리면 특이점에게 보내도록 하지. 기대해도 좋아!
하나의 시련을 돌파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지타의 등을 윌나스가 힘차게 두들겼다.
루 오
이걸로 시련 두 개를 끝냈군요...
...
3-3
고양이
냐아...
낮부터 갑판에서 뒹굴다 밤을 맞이한 고양이는 문득 어떠한 기운을 느끼고 눈을 떴다.
루 오
내게 순서가 돌아온 것을 기쁘게 여겨야 하는 걸까... 페디엘이나 윌나스나 장난이 심하군. 아무런 위기감도 없는 건가?
고양이
냐아...
루 오
둘로 갈라진 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애초에 창세부터가 기능 부전을 일으킨 거다. 이 세계는 너무나도 일그러졌다. 각지에 '웅덩이'가 만들어졌지... 간과했다간 언젠가 멸망을 부를 거다.
이 상황에서도 파멸의... "하늘의 신"은 뭘 느긋하게 잠들어 있는 거지? 그 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생각이 없다면 우리 육룡이 그 힘을 얻어 세계를 바로잡아야 해...!
루 오는 주먹을 꽉 쥐며 밤의 장막을 흘겨보았다.
루 오
깨어나지 않는 신에게 영원한 잠을, 하늘의 세계에 아침을 가져다주는 것이 나의 책무...! 특이점.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고양이
냐앙.
비이
오늘 시련 담당은 루 오구나!
루 오
그렇다. 이 루 오에게는 붉은 용의 힘을 얻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러니 특이점. 나를 막으려고 한다면... 그 모든 힘을 펼쳐 내게 덤벼야 할 것이다!
비이
으어!? 뭐야! 갑자기 분위기 완전 다르잖아!
루 오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지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루리아
꺄악!
루 오
다음엔 제대로 맞출 것이다. 자, 특이점. 시련에 도전하겠느냐, 포기하겠느냐!
루리아
지타...!
그의 재촉에 지타는 루리아와 비이를 감싸듯이 무기를 들고 루 오 앞에 섰다.
루 오
그거면 된다. 푸른 소녀, 붉은 용. 방해하지 마라.
비이
그런...! 아무리 그래도 육룡이랑 일대일로 싸우라니. 그게 말이 돼?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 힘같은 건...
3-4
루 오
오오오오오!
육룡의 "백", 루 오의 시련. 그것은 루 오와의 일대일 전투였다. 지금까지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던 육룡들을 떠올리며 지타는 전력을 다해야 할지 어떨지 망설이고 있었다.
루 오
여유 부리지 마라, 특이점. 아니면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가려 하느냐? 실망스럽군!
비이
지타...!!
비이
그만 해, 루 오! 애초에 난 그 "힘"이라는 걸 줘도 상관없단 말이야! 이렇게 위험한 짓을 할 필요는...
루 오
...스스로 끝을 받아들이려는 건가?
비이
뭐...?
루 오
"힘"은 "힘". 붉은 용 자신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힘"을 몸 안에 축적하는 것은 붉은 용의 근간을 이루는 기능이다.
비이
뭐야... 겁먹게 만들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 줘!
루 오
힘을 수여하는 것이 네 기능의 종착점. 즉 기능 정지를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비이
기능 정지...
루리아
그거 설마...
루 오
죽음이지. 육체가 무너지지 않는다 해도 본디 수여대상이 아닌 육룡에게 힘을 넘겨줌에 따라 기능 부전을 일으키고... 어떠한 영향이 붉은 용에게 발생할 확률이 높다. 신체의 파손, 기억의 상실, 감정의 붕괴... 어느 것이 되었든 지금의 붉은 용 그대로는 유지되지 않을 거다.
동정심을 띤 루 오의 시선을 받자 지타의 등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비이
뭐야... 그게 뭔데! 나, 그런 얘긴 전혀...
루 오
그릇이 알 필요는 없지. 우리도 알릴 필요가 없고. 애초에 나와 동격의 존재가 그것을 알리지 않은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일 거다. 모래 한 알과 섬 하나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이 실례를 저지른 모양이군. 나는 네게 경의를 표하겠다... 육룡의 힘으로써 말이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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