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 관측
Observation
1
피오리토
으음... 여기는...
루리아
피오 씨...! 정신이 드셨군요!
비이
아, 움직이지 마. 근육 누님 3일이나 누워 있었으니까.
피오리토가 눈을 뜨자, 단장 일행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침대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피오리토
코루루쨩은? 어떻게 ㄷ...
티코
진정해. 일단은 진찰이 먼저거든.
티코의 진찰을 받은 피오리토는 구 천문대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전말에 대해 들었다.
피오리토
그래... 다들 무사히 돌아왔구나. 코루루쨩도 구해냈고... 정말 다행이다.
비이
그러게. 상처도 없었고 세뇌인지 뭔지도 당하지 않았어.
루리아
결국 나비스가 왜 코루루쨩을 유괴한 건지는 알 수 없었네요.
티코
우리를 거점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일이었겠지만, 그래서 뭐가 하고 싶었던 건지도 전혀 모르겠거든.
피오리토
...
비이
아, 맞다. 우리도 누님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피오리토
응? 어떤 얘기?
비이
3층에서 얘랑 같이 라비리타에 맞서 싸웠었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해서.
관측실에서 코루루를 구해낸 후 3층으로 달려내려간 비이 일행.
비이
그런...
그곳에 라비리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남아있던 것은 쓰러져 있는 단장과...
루리아
저희가 본 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피오 씨였어요...
티코
그 자리에서 응급처치는 했지만 단장은 경상이었고, 피오리토는 상당히 중상이었거든.
비이
얘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근육 누님이 라비리타하고 싸우고 있었던 거 맞지...?
피오리토
...그래. 단장이 당해서 큰일났다! 라고 생각했지. 뭐, 거의 무승부였다고 해야 하나? 녀석을 전투불능으로 만들긴 했지만 나도 당했으니까.
티코
꽤 하는걸, 피오리토. 상대는 어떤 능력을 썼어?
[고마워]
피오리토
어? 어음... 무아지경에 빠져 있어서 잘 모르겠더라고.
티코
그렇구나. 뭐, 지금 막 일어난 참이니까 사소한 부분은 나중에 기억날지도 모르거든. 아무튼 한동안은 여기서 푹 쉬면 돼.
티코 일행은 침대 곁을 떠나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늘에 가려져 있던 옆 침대 쪽의 모습이 보였다.
피오리토
...! 저기 누워있는 사람은...
온 몸에 의료기기를 연결한 빨간 머리의 소년이 그곳에 누워 있었다.
티코
...걱정하지 마. 손상된 부위가 너무 많아서 당분간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할 거거든. 아니... 아닌가. 의사로서는 걱정해야 되는 상황이려나.
루리아
티코 씨...
티코는 복잡한 표정이었지만 금방 평소같은 모습으로 돌아옸다.
티코
...괜찮아. 이 사람을 구해낸 걸 후회하지는 않으니까. 내가 쓰러뜨려야 하는 것은 페르디난드...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어. 게다가 이 오디터에게서 정보를 캐낼 가능성도 있거든.
티코는 힘주어 말한 후 이번에야말로 문을 열었다.
루리아
그럼 피오 씨. 편히 쉬세요.
비이
근육 트레이닝은 절대 하면 안 된다?
피오리토
다들 고마워.
피오리토는 방을 나서는 단장 일행을 배웅했다. 그리고 한숨을 쉰 후, 곁에 누워 있는 라가초의 옆얼굴을 살펴보았다.
피오리토
...선배. 엉망진창이잖아. 입으로는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라가초
......
피오리토는 잠시 기다렸으나 깊은 잠에 빠진 라가초에게서 난폭한 대답이 들려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피오리토
... 단장네한테 거짓말을 했어. 하지만 배신할 생각은 아냐. 이게 나의 결의니까.
[회상]
쿠피탄
특히 "배신"의 청보라색이 만난 날부터 오늘까지 점점 짙어지고 있어요.
피오리토
내가 배신한 건 나비스 쪽이었다는 거지.
...알아? 이거 다 당신 탓이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졌거든.
[회상]
피오리토
"스파라이"여... 불석신명不惜身命*의 각오로, 나의 혼을 피워내라!
하아!
미안、단장...
...호로스코프(점성무기) "스파라이"는 "혼"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물리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을 지닌다. 단장의 혼을 때려눕혀 의식만을 빼앗은 나는...
라비리타
수고하셨습니다, 피오리토 씨. 남은 공작은 제가 맡도록 하죠.
피오리토
기다려, 라비리타. 상담하고 싶은 게 있어.
라비리타
...여기서 저와 상담이라고요? 귀찮은 일일 거라는 예감밖에 들지 않는군요.
피오리토
내가 가진 돈 전부 넘길게. 나비스에 들어온 이후로 모은 거 전부.
피오리토는 품을 뒤지더니 순금 덩어리를 차례로 꺼내어 건넸다.
라비리타
...정말 귀찮은 일인 모양이군요.
피오리토
앞으로 들어올 돈도 전부 넘길게.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줘.
라비리타
제가 받아들일 거라는 보장은 없는데요? 체어맨과의 계약보다 매력적이지 못하다면요.
피오리토
돈만 받으면 할 거잖아?
라비리타
하아... 당신의 배짱은 예전부터 변하질 않는군요.
...뭔가 이렇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긴 했었습니다.
피오리토
뭐...?
라비리타
어디 말씀해 보시죠.
피오리토
나를 총으로 쏘고 여기서 떠나 줬으면 좋겠다는 것... 그게 내 "의뢰"였어. "라비리타 개인의 미스로 피오리토에게 중상을 입히고 말았다. 그래서 단장을 죽이지 못했다." 고 체어맨에게 허위 보고를 해 달라는 내용이었지.
피오리토는 임무 실패의 책임을 지지 않고, 단장은 살해당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피오리토
...단장 일행은 계속해서 믿어 줬어. 이렇게 제멋대로인 나를 말야. 나도... 그 마음에 답하고 싶어.
언제부터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더라고. 모두와 함께 있고 싶다고... 그게 나의 "하고 싶은 일"이라는 것을 선배의 말을 듣고 나서 깨달았어.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냐. 나는 반드시 나비스를 쳐부술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오디터를 그만둘 수 없어. 둘 다 성공시키고 말겠어. 정말 "하고 싶은 일"이니까.
피오리토는 라가초 앞에서 진상을 밝혔으나, 그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피오리토
내가 이렇게 큰 결심을 내렸는데, 당신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전에 말했잖아. 선배가 하고 싶은 일은...
[회상]
라가초
내가 나비스에 있는 이유는... 빚을 갚기 위해서야. 평생이 걸려도 다 갚지 못할 정도의 거대한 빚을 말이지.
피오리토
혹시 그거...
라가초
아 그리고 또 하나.
오디터라는 녀석들... 하나같이 다 죽상에 괴로워 보이는 녀석들이잖아? 하지만 의외로 싫지 않더라고. 입만 열면 어리석다 타령하는 여자에, 탐욕 넘치는 상인. 근육녀... 그런 개성 찐한 녀석들이 많이지.
피오리토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창문 밖에 펼쳐진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피오리토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조타수는 왕자님을 생각했어. 나는 가장 먼저 단장네가 생각났고, 그 다음에는...
피오리토는 입술을 깨물며, 처참한 모습으로 누워 있는 라가초에게 시선을 돌렸다.
피오리토
...선배 얼굴이 떠오르더라고. 덤으로 라비리타랑 트리스테트도.
난 정말 바보야...! 더 빨리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피오리토는 의식 없는 라가초에게 말을 걸며 솟아오르는 눈물을 훔쳤다.
피오리토
...오디터는 단순한 장기말에 불과해. 이번 크림슨 핑거... 호로스코프가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조차 체어맨은 우리에게 숨기고 있었어. 성정수 아르고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야. 나비스의 진짜 목적은 세 명의 체어맨만이 알고 있지. 하지만 오디터와 연락을 취하는 것은 늘 페르디난드... 다른 두 명은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아.
반드시 쳐부수겠어...! 페르디난드도, 다른 두 체어맨도...!
피오리토는 주먹을 꽉 쥐며 굳게 다짐했다.
페더
하아아아아아!
란돌
으랴아앗!
초원에서 두 투사가 격렬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이윽고 잠시간의 휴식시간이 찾아왔고, 페더는 자신의 무기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페더
결국 뭐 하는 사람이었을까? "사자왕전권"을 주고 간 그 여자.
란돌
글쎄다. 알 수 있는 거라면 내게 "쥬와유스"를 넘겨준 여자하고 같은 녀석이라는 것 정도야.
페더
나는 간다고우자가 있는 곳에 이동시켜 주더니, 그 후에 휘리릭~ 하고 건네줬어.
란돌
어떻게 줬다는 건데 그게...
페더
딱히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어. 란돌은 어떻게 받았는데?
란돌
...
너한테만은 절대 안 가르쳐 줘.
페더
뭐...!? 그게 뭐야? 우리 유일무이한 강적(라이벌)이잖아? 그럼 서로 숨기는 것도 없어야지!
란돌
...!? 시끄러, 조용히 해 바보야!
자세한 사정은 결국 밝히지 않은 란돌이었으나, 그의 옆모습은 어딘가 후련해 보였다.
페더와 란돌은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어두웠던 천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페더
라가초... 빨리 눈 떴으면 좋겠다.
란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페더
어, 어째서? 란돌도 라가초랑 대화하면서 정들지 않았어?
란돌
그래서 더 그런 거야. 그 녀석은... 마음 깊이 믿고 있었던 녀석에게 배신당했잖아.
페더
...!
란돌
그 아픔도 고통도, 나한테는 상상조차 안 가... 눈을 떴을 때 모든 걸 잃었다면 넌 어떻겠어?
페더
...
페르디난드가 저지른 짓이 페더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페더
하나 결심한 게 있어.
란돌
아마... 나도 같은 생각일 거다.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나 서로를 바라보며 자세를 취했다.
페더
페르디난드... 녀석만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란돌
그래...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그 낯짝을 후려차 주겠어!
라가초의 원한을 짊어지고, 페더와 란돌은 페르디난드를 쓰러뜨리겠다고 결심했다.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힘으로 바꾸며 두 사람은 평소처럼 단련에 힘쓰기 시작했다.
2
쿠피탄
...
맑게 갠 하늘 아래, 쿠피탄은 긴의자에 걸터앉아 하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쿠피탄에게는 그 시간이 며칠, 또는 몇 년에 버금가는 흐름처럼 느껴졌다.
티코
...옆에 앉아도 돼?
쿠피탄
...
한 소녀가 다가와 쿠피탄 옆에 덜렁 주저앉았다.
티코
언젠가 비가 오던 날... 당신은 내 이야기를 들어 줬었지. 이 긴의자에 앉아서.
쿠피탄
...
티코
감정의 색같은 건 보이지 않아도 다정하다는 걸 알 수 있었거든.
쿠피탄
...다정하지 않아요.
쿠피탄은 고개를 푹 숙이고 고해하듯이 입을 열었다.
쿠피탄
리스쨩 말대로예요... 아마도 저는 리스쨩을 깔보고 있었던 거예요. 친구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안심하고 싶었던 것뿐.
정말 최악이에요... 저는. 리스쨩을 쫓을 자격조차 없어요.
티코
그러면 그 머리장식, 떼는 게 마음 편하지 않겠어?
쿠피탄
네...?
티코
선물이었지? 거울을 볼 때마다 생각나서 괴로울 거거든.
쿠피탄
...!
하, 하지만... 이건...
쿠피탄은 무언가에 매달리려는 듯이 손으로 머리 장식을 감쌌다.
티코
그래 그래. 쿠피탄의 감정이 보인다. 지금도 트리스테트를 쫓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
쿠피탄
...!
티코
그야 인간이란 타산이나 악의, 질투같은 걸 다양하게 품고 행동하겠지만. 친구를 걱정하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일까? 누군가가 가르쳐 줬거든. 동료를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은 반짝거리는 거라고.
쿠피탄
티코 씨...
쿠피탄은 고개를 들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쿠피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리스쨩을... 하지만 모르겠어요! 리스쨩이 무슨 생각인 건지! 깔보는 게 뭔데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걸. 친구라는 건 대등한 거잖아!
티코
아... 트리스테트의 감정의 색은 안 보기로 했다고 했었지...
쿠피탄
...친구니까 안 본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무서웠던 것뿐이에요. 리스쨩의 감정의 색을 알아버리는 것이.. 가장 친한 친구라면 더 제대로 알았어야 하는데...!
애매했던 것이 분명히 눈에 비친다는 공포 앞에서 쿠피탄의 손이 작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티코는 그 손을 잡으며 밝게 웃었다.
티코
마음 속이 보이지 않아도 친구가 될 수 있거든.
쿠피탄
네...?
티코
저기, 우리 산책 좀 하자. 예전의 약속을 지키고 싶거든.
티코는 쿠피탄의 손을 잡아끌며 활기찬 번화가로 향했다.
티코
저 가게 좀 봐. 별 모양 초콜릿 팔고 있어!
쿠피탄
네? 음...
티코
스텔라 섬의 특산물인 걸까? 한번 먹어보고 싶다!
쿠피탄
으아아...!?
쿠피탄은 티코가 잡아끄는 대로 따라다니며 거리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그저 묵묵히 걷기도 하며. 두 사람은 그저 한동안의 시간을 보냈다.
쿠피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감사했습니다.
티코
인사는 필요없거든.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조금 부끄럽지만... 우리, 이미 친구잖아?
쿠피탄
네...?
티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쿠피탄에 대해 아직 다 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난 그렇게 생각하거든.
쿠피탄
티코 씨...!
스텔라 섬의 높고 드넓은 밤하늘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쿠피탄
으으으... 푸에에엥!!!!
티코
이렇게 갑자기? 아 정말, 흥 해 흥!
쿠피탄
흐읍... 흥!!!!!!
재송해여... 너무 기뻐서...!
티코
깜짝 놀랐거든...
쿠피탄
훌쩍... 정말 감사합니다.
티코
아까도 말했지만 인사는 필요 없다니까.
쿠피탄
아, 그랬었죠...!
쿠피탄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을 닦은 후 주먹을 꽉 쥐었다.
쿠피탄
...저, 결심했어요. 리스쨩을 쫓아가서 제대로 대화한 후... 다시 친구가 될 거예요.
티코
응. 응원할게. 분명 전보다 친해질 수 있을 거야. 상처란 나으면 더 단단해지거든.
쿠피탄
에헤헤... 열심히 할게요, 티쨩!
티코
티쨩...? 그거 설마 나 부르는 거?
쿠피탄
네! 오늘부터 그렇게 부를게요!
이번에는 활짝 웃는 쿠피탄을 본 티코도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쿠피탄은 일행에게 인사한 후 트리스테트를 쫓기 위해 혼자 어딘가로 떠났다.
단장 일행은 피오리토의 상처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스텔라 섬을 떠나는 정기선에 올라탔다. 라가초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채였고, 배 위에서도 티코가 그를 계속해서 치료하고 있었다.
그런 여행 도중, 일행은 코루루의 무사한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소소한 연회를 개최한 참이었다.
코루루
우, 우와... 어쩜 이렇게... 호화로운 식사일 수가...! 저를 위해서 이리 차려주시다니 면목 없소이다!
피오리토
다 함께 만들었어. 오늘은 실컷 먹어!
코루루
알겠소이다! 마음 놓고 먹겠소이다!
피오리토
...정말 미안해. 무서운 일을 당하게 만들어서...
코루루
우물우물... 에? 무슨 말 하셨소이까?
피오리토
아니, 아무 것도 아냐!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싶길래!
비이
오? 코루루가 먹는 그거, 프라이드 치킨이잖아!
코루루
우물우물... 생명의 은인이라 부를 수 있는 음식... 몸에 한껏 스며드외다!
비이
아, 그 뼈 말하는 거구나? 트루가 찾아내 줄 거라고 생각해서 그것만 먹었다고 했었지.
코루루
그때 트루 씨가 갑자기 팍 떠오르길래...정말 감사하기 그지없소이다!
트루
네...? 아뇨,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시끌벅적한 연회가 끝나고, 트루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어떤 노트를 펼쳤다.
트루
...
그곳에는 나비스에 대해 트루가 밝혀낸 정보가 쭉 적혀 있었다. 아침이 되면 기억을 잃어버리는 트루는 물건에 깃든 기억을 토대로 동료들과의 연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나... 나비스 사건에서 있었던 일은 기억을 깃들게 할 만한 물건이 없었기에, 수첩과는 별도로 준비한 노트에 요점을 정리해 둔 것이었다.
트루
그렇구나... 그날 나비스 거점에 돌입해서 많은 일이 있었어...
응? 이 부분은 뭐지...
트루는 페이지 구석에 무언가를 적었다가 지운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트루
그라시저...라고 적혀 있는 건가? 코루루 씨의 무기 이름이지? 왜 이걸 적었다 지웠지?
장갑을 벗은 트루는 손 끝으로 그 흔적을 살짝 건드렸다.
트루
이때의 나는...
[회상]
트루
아냐... 상당히 오래된 기억인 듯하고, 나비스와 관계된 것도 아니잖아? 잊어버리자... 코루루 씨에게 있어 알리기 싫은 기억이라면 나도 알아선 안 되니까.
나도 그렇게 무서운 기억은 견디기 힘들고...
트루
...? 난 대체 뭘 본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트루는 며칠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것은 나비스 거점 관측실에서 코루루를 구출해낸 직후의 일이었다.
코루루
이런...!
트루
위험해요!
배가 텅 빈 탓에 비틀거리는 코루루를 트루가 손으로 받쳐준 순간...
트루
...!!
주변의 기억을 더듬기 위해 장갑을 벗고 있던 그의 손에 코루루가 들고 있던 그라시저가 닿았다. 그리고 트루의 머릿속으로 창에 깃들어 있던 선명한 기억이 보였다.
코루루
쓰레기의 산이... 불타고 있소이다...
할머니
코루루! 가만히 있지 말고 어서 도망가렴!
할아버지
으으...! 어서 불을 꺼야 하는데...
코루루
왜 그러시는 것이외까? 두 분도 함께 타고 도망가면...
할머니
우리는 됐단다.
코루루
됐다니... 뭐가 됐다는 것이외까!
할아버지
코루루... 우리 몫까지 행복하거라.
그 옛날, 어린 코루루가 살고 있던 작은 섬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작은 섬을 전부 불태웠으나, 코루루는 조부모의 작은 기공정을 타고 바깥 세계로 도망쳐나온 것이었다.
트루
...!? 죄, 죄송합니다. 코루루 씨!
코루루
네...? 저야말로 죄송하외다. 배가 고픈 바람에...
트루는 재빨리 창에서 손을 떼었으나 차가운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고, 맥박이 엄청난 속도로 뛰었다.
트루
(방금 그건... 코루루 씨의 기억...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 사람... 불 안쪽에 서 있었던 건...)
[회상]
기분 나쁜 남자
......
트루
저 차가운 눈빛이라니... 마치 저 사람의 주변에만 불이 닿지 못하는 느낌...
트루
...!
코루루
트루 씨...? 안색이 좋지 않은 듯이 보이외다... 괜찮으시외까?
트루
신경쓰지 마세요. 금방... 떨쳐낼 수 있으니까요.
환시로 본 광경의 잔상 속에서 트루는 공포를 떨쳐내려는 듯이 자신의 팔을 감쌌다.
트루
(신경쓰이지만... 코루루 씨의 사정에 마음대로 개입해서는 안 돼.)
머나먼 곳으로 사라진 기억에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도록, 트루는 조용히 노트를 덮었다.
3
어딘가의 섬, 어딘가의 방 안에서 두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라비리타
이상, 안건 보고였습니다.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이번에는 저의 실수로 인해 성좌를 달성시키지 못하여 대단히 죄송했습니다.
페르디난드
그렇군... 즉 피오리토 군의 책임은 없다는 건가.
라비리타
예, 그 말씀대로입니다. 뭔가 제재가 필요하다면 제게 내려 주십시오.
페르디난드
아, 그런 건 됐어. 그녀에게도 자네에게도 화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라비리타가 실수를 저지르다니 흔치 않은 일이군.
라비리타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페르디난드
뭐, 신경쓸 거 없어.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라비리타
...예. 정진하겠습니다.
페르디난드
후우...
페르디난드는 한숨을 쉬더니 창문 밖에 펼쳐진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페르디난드
하아... 아름다워. 어디서 봐도 정말 멋지군.
그의 등 뒤로 소리없이 누군가가 나타났다.
기분 나쁜 남자
페르디난드... 설마 방금 보고를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페르디난드
오호, 쥬다인가.
어둑어둑한 방 안에 나타난 것은 어둠 속에 녹아들듯이 검은 수트를 걸친 남자였다.
페르디난드
자네는 현장에서 오디터들과 접촉하지 않으니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귀여운 부하들의 보고를 의심하다니, 난 도저히 그럴 수 없어.
쥬다
유희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다. 네가 의심중인 건 나와 피오리토인가?
페르디난드
설마, 말도 안 돼! 동지인 체어맨을 의심하다니, 더욱더 말도 안 되지!
쥬다는 페르디난드 곁에 나란히 서더니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쥬다
애초에 단장 암살 의뢰같은 건 우리 계획에 없었을 텐데. 천문학자를 경유해 기공사들을 거점에 오게끔 유도하기만 하면 성좌가 완성되었을 거다. 허나 너는 천문학자를 살해하고 일부러 피오리토에게 증거를 찾아내게 만들어 그녀에게 암살을 의뢰했지... 모든 것은 너의 독단으로 벌어진 일이다. 해명할 것은 있나?
페르디난드
미안했어. 문득 변덕이 일어서 피오리토 군을 시험해 보고 싶어지더군.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애드립을 보여줄지... 뭐, 과정은 달라져도 그들이 그 거점에 닿았다는 결과에는 변함이 없었잖나? 물론 단장이라는 관측자를 살려두는 결말도.
쥬다
... 분명 피오리토는 내 "성좌" 하에 무기와의 적합을 이루어냈다. 허나 다른 연결점은 없어. "성좌" 이상의 간섭은 한 적 없다. 너와 라가초의 관계나 마찬가지야.
페르디난드
그래... 그렇다면 됐어. 하지만 그 아이의 성좌는 처음과는 대본이 달라졌어... 흥미를 가지는 게 당연하지.
쥬다
...
서로의 의중을 떠 보려는 것처럼 진실을 종잡을 수 없는 대화가 밤의 장막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쥬다
...너를 만나러 온 것은 이런 옥신각신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페르디난드
그래, 그랬어. 작전에 대해 평가해야겠지.
페르디난드는 지금 떠올렸다는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페르디난드
우선 이번 계획의 첫번째 목표, "사자왕전권"과 "쥬와유스"를 상응하는 자에게 적합시키는 것.
쥬다
리오네(사자자리)와 아쿠아리오(물병자리)... 네이탈 차트(소질)가 뛰어난 자의 손에 들어간 것은 이야기에서 필연이라 할 수 있겠지.
페르디난드
다음으로 두번째 목표. 성률(하모닉스)한 "크림슨 핑거"를 적합자에게서 회수하는 것.
쥬다
나의 가설이 실증되었군. 역시 적합자들 간 극한의 교류야말로 호로스코프를 성률시키는 트리거였어.
페르디난드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 가슴의 두근거림을 멈추기 힘든걸. 목표를 달성하여 성좌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성정수 아르고에 한층 가까워졌어.
쥬다
다른 적합자는 어떤 상태지?
페르디난드
흐음, 스콜피오네(전갈자리)의 트리에스테와 토로(황소자리)의 라비리타는 나중으로 미뤄도 되겠나?
쥬다
그래도 된다. 다른 오디터들의 이야기가 움직이는 건 아직 조금 뒤잖나.
페르디난드
그럼 우선 "무지개의 활"을 가진 쿠피탄 군. 적합자와 좋은 교류를 이뤄냈지만 성률까지는 아직 멀었어.
쥬다
페이시(물고기자리)인가... 흥미로운 사인(상징)이긴 하다.
페르디난드
피오리토 군도 아직 시간이 걸릴 것 같고. 아, 티코 선생님은 잘 진행됐더군.
쥬다
그럼 그 뱀주인 쪽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진척이 상당히 이루어졌을 텐데.
페르디난드
"듀랜달"의 적합자는 아직 능력조차 깨닫지 못했지만, 씨는 뿌려 두었어. 코루루 군도 마찬가지야. 슬슬 과거의 노력이 결실을 맺겠군. 노력한 보람이 있는걸...
쥬다
그런가... 그때 그 카프리코르노(염소자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다니 감회가 깊은걸.
페르디난드
복수자의 손에 쥐어진 그라시저라... 숙명적이군.
두 체어맨은 그 후로도 잡담을 나누는 듯한 태도로 "성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야기가 일단락될 때쯤, 창문 밖으로 유성이 흘렀다.
페르디난드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쥬다
유성에게 비는 기도인가. 다양한 의미로 의미가 없군.
페르디난드
아, 그렇지... 성정수 아르고와 만날 수 있기를.
쥬다
...그것도 의미 없어.
페르디난드
하하, 미안 미안. 뭔가 즐거워져서 말이지.
쥬다
아르고나비스-위대한 이야기 속의 배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적합자들은 이 이야기의 주역이자 스타다.
페르디난드
즉... 각본대로 움직이는 인형이라는 건가?
쥬다
지루하기 짝이 없지.
두 사람의 시선 끝에는 무궁한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곳의 별들은 정해진 시간에 예측할 수 있는 좌표를 따라 그저 빛을 내뿜을 뿐이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치 대본을 따르듯이 말이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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