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이었다. 차가운 아침안개가 감도는 한 섬의 엄숙한 사당 앞에 심각한 표정의 남자들과 두 명의 소녀가 서 있었다.
쿠비라
말도 안 돼... 저번에 보러 왔을 때에는 분명히 조야가 있었는데...
두꺼운 대나무처럼 생긴 무기를 짊어진 소녀의 이름은 쿠비라. 그녀는 해신궁*의 주인이자 북북서쪽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亥돼지 해
젊은 남자
정말 죄송합니다, 쿠비라 님.
촌장
조야를 감시하기 위해 살고 있는 저희 일족이 이런 불찰을 저지르다니...
쿠비라
아냐, 당신들 잘못이 아닌걸. 내가 어제 조야를 확인하러 왔을 때 좀 더 자세히 봤더라면 폭주하는 걸 막을 수 있었을 거야... 바지라쨩도 전에 조야가 폭주했을 때 엄청 힘들었다고 이야기해 주기까지 했는데...
조야. 그것은 하늘의 세계에 흘러넘치는 "번뇌"를 모아 욕망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종이었다.
연말이 되면 십이신장들은 종을 두들김으로써 일 년 내내 조야가 모아들인 번뇌를 털어냈다. 그렇게 하면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번뇌의 균형이 유지되어 세계가 계속 별탈없이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조야는 단순한 그릇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모아들일 수 있는 번뇌의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도를 넘어선 번뇌의 양을 더 이상 이겨낼 수 없게 된 조야는 지금까지 세 번에 걸쳐 폭주했다.
마지막 폭주 때에는 하늘의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현현한 성정수의 손을 빌려야 할 정도로 큰 소동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젊은 남자
사실 이번에 조야가 사라지게 된 것은 예전과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쿠비라
응...? 폭주하면서 어딘가에 가버린 거 아니야?
촌장
사당 앞을 보십시오. 눈밭에 수많은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이 보이시지요?
젊은 남자
어제는 해가 질 때까지 눈이 내렸으니, 어젯밤에서 오늘 아침 사이에 찍힌 발자국일 겁니다. 누가 봐도 이 섬에 사는 사람의 신발 자국이 아닙니다. 섬 밖에서 누군가가 침입한 거겠죠.
쿠비라
그럼 누군가가 조야를 훔쳐갔다는 소리야?
촌장
아마도 그럴 겁니다. 배를 댈 만한 변두리까지 발자국이 이어진 것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쿠비라
그래. 생각해 보니 폭주한 거라면 이 근처에 번뇌의 기운이 잔뜩 퍼져 있었겠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조야를 가지고 뭘 할 생각인 걸까? 지금은 일 년 중에서도 가장 번뇌가 많이 모여 있을 때라서 십이신장조차도 접근할 때 조심해야 할 정도인데...
???
그러게. 조야를 훔쳐간 사람들도 걱정된다.
쿠비라 곁에서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큰 귀 머리띠를 한 소녀가 심각하게 팔짱을 꼈다.
쿠비라
미안해, 비카라쨩. 새해가 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이 사건을 해결해 볼게.
비카라
후후! 그렇게 혼자 모든 일을 떠안으려고 하는 게 쿠비라의 나쁜 점이라니까! 나도 십이신장인걸. 같이 조야 찾으러 가자. 둘이 같이 열심히 해 보는 거야!
쿠비라
고마워. 그렇게 말해 주니까 마음이 든든하다.
두 십이신장은 조야를 되찾기 위해 사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마키라
이 부품은 아래쪽 구멍에 꽂고...
한편, 사당에서 멀지 않은 마을의 한 창고 안에서는 어떤 소녀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열심히 무언가를 조립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조신궁*의 주인이자 서쪽의 수호신인 마키라로,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기계를 연구하고 있는 소녀였다.
*鳥새 조
마키라
음, 이 커다란 용수철은... 아, 또 이 말이네. 홍경황고, 광혜항행*... 역시 이 암호가 가리키고 있는 곳은 여기야. 그러면 설계도대로 이렇게 해서...
*(원문은 紅頚黄鼓、光慧航行으로 별 뜻은 없고 발음이 닭의 울음소리와 비슷함을 이용한 말장난입니다. 꼬꼬댁 꼬꼬같은 느낌으로 읽습니다)
조야?
......
마키라가 마지막 부품을 끼워넣자, 종 모양을 한 무언가가 안쪽에 있는 부품을 회전시키며 반응했다.
마키라
성공적으로 기동됐네요. 그럼 내부 구조 분석을 시작할게요.
마키라는 방금 완성시킨 종에 사각형 장치를 붙인 후, 파장을 맞추기 위해 다이얼을 돌렸다.
조야?
......
☆&※@×♪#&!?!?
마키라
아! 좀 더 조정할게요.
조야?
......
.................................
!!
마키라
응? 아, 된 건가? 그런데 이 파장은 뭐지? 본 적이 없는 형태인데...
마키라는 의아해하면서도 계속해서 다이얼을 돌리며 조정해 나갔다.
조야?
......
~~♪~~♪
그 누구도 마키라가 만들어낸 이 작은 종이 나중에 하늘의 희망을 짊어지는 존재가 되리라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다.
제야의 끝에서 울리는 종소리
Elegy for Auld Lang Syne*
*영문판 제목에서 Elegy는 애도의 노래를 뜻하며, Auld Lang Syne(올드 랭 사인, 작별)은 영미권에서 연말연시에 부르는 노래의 제목입니다.
오프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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